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스-루돌프 뢰싱 (문단 편집) == 논란 == U-415의 함장을 지낸 헤르베르트 베르너(Herbert A. Werner : 1929~2013)는 전후인 1969년에 독일과 미국에서 동시에 펴낸 자서전 "철의 관(Die Eisernen Särge)"에서 [[크릭스마리네]]의 잠수함 부대에 관한 처우와 전쟁 당시 내렸던 명령에 관해 설명하는 단락에서 뢰싱에 관해 언급했었다. 당시 [[캐나다]]에서 사업을 하며 지내던 베르너는 이 회고록을 통해 유보트 부대를 미화하고 잠수함 승조원들을 신화로 만드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르너는 그의 책에서 1944년 여름 프랑스 북부에 주둔한 제1잠수함대 사령관으로 있던 뢰싱은 연합군의 상륙이 임박하자 "해협 명령 1호(Order Kanal Nr. 1)"라는 제목이 붙여진 다음과 같은 지령서를 하달했다고 기술했다. >'''"상륙에 투입되는 적 전차 1대는 100명의 무장 병력이 뭍에 오르는 것과 맞먹는다. 그러므로 대서양 연안에 전차가 상륙하는 사태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한다. 모든 잠수함장들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심지어 자신의 함정을 잃을 위험에 처하더라도 상륙함 공격을 우선하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적의 상륙함대에 접근할 때 얕은 물이나 기뢰로 차단된 해역, 적에게 노출되는 사태 같은 위험은 고려하지 말아야만 한다... (중략) 모든 함장들은 더 심각하고 전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임무를 맡게 된 것이며, 조국 독일은 귀관들에게 가장 힘든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이 논란은 이른바 ''돌격 명령(Rammbefehl)''으로 알려지며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예를 들어, 영화 [[특전 유보트]]의 원작자 로타르 귄터 부크하임(Lothar-Günther Buchheim) 같은 유보트 승선 경험자도 훗날 자신의 배를 희생하도록 요청한 해협 명령 1호를 읽었다고 주장하며 헤르베르트 베르너에게 공감을 했다. 그렇지만 위르겐 로베(Jürgen Rohwer)가 베르너의 책을 출판할 때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이 그 진술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견해를 보였다. 마찬가지로 유보트 함장이나 승무원 출신이었던 다른 증언자들은 그 명령서에는 기뢰를 피하여 전투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복귀하라고 쓰여있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베르너는 전쟁 후기에 함장이 되었고 변변한 전과도 없었던 데다, U-415를 좌초시켜 배를 잃은 책임이 있는 함장임을 지적하며 증언의 신빙성에 관해 이의가 제기되었고, 출판사 대표인 로베도 뢰싱이 평소 보인 행동으로 보았을 때 그런 난폭한 명령을 하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2001년에 이 주제에 관해 논문을 쓰던 24세의 대학생 라스 보덴슈타인(Lars Bodenstein)과 가진 인터뷰에서 뢰싱은 자신이 내린 명령은 그런 내요이 아니었으나, 일선 잠수함장들이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에 대하여 배제하지 않았다. 역사가 디에터 하르트빅(Klaus Dieter Hartwig)은 이 명령을 가미카제 작전으로 간주하며, 이에 상응하는 처벌이 불가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연합군의 상륙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출동한 유보트 30척 중에서 20척은 돌아오지 못한 탓에, 이 논란은 결론이 난 상태는 아니다. 한스-루돌프 뢰싱은 1944년 가을에는 [[노르웨이]]로 옮겨 프랑스에서와 같은 보직을 유임했고, 독일이 항복한 후에는 1년 이상 [[연합군]] 정보부대에 의해 독일의 잠수함 전술과 운용 체계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면서 포로 생활을 해야만 했다. 1947년 초에 풀려나고 보니, 그와 함께 해군 장교로 복무했던 형제들은 모두 죽고 막내아들인 자신만 살아남았다. [youtube(/p4_R6PnmFXc)]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